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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시간         (김영하 목사)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간디를 가르쳤던 교수 중에 피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간디가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에 대해 아주 불쾌해 했습니다. 하루는 피터스 교수가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간디가 옆자리에 와서 앉았습니다. 그러자 피터스 교수는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간디군, 뭔가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없다네.” 그러자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교수님, 그럼 어서 다른 곳으로 날아 갈게요...” 복수심에 불탄 피터스 교수는 다음 시험에서 아주 어려운 문제로 간디를 골탕 먹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간디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피터스 교수는 분을 삭이며 간디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간디군이 길을 걷고 있는데 두 개의 자루를 발견했네. 한 자루에는 돈이 가득 들어 있고, 다른 자루에는 지혜가 가득 들어 있었네. 만약 둘 중 하나만 주울 수 있다면 어떤 쪽을 택하겠는가?” 간디가 말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돈 자루죠.” 그러자 피터스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쯔쯔쯧) 나라면 지혜를 택했을 거네.” 그러자 간디가 다시 말했습니다: “뭐, 아무래도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것 아니겠어요? ” 화가 날 때로 난 교수는 간디의 시험지에 신경질적으로 “idiot(멍청이)”라고 적은 후에 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시험지를 받아 든 간디가 피터스 교수에게 다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제 시험지에는 점수는 안 적혀 있고, 교수님 싸인만 있는데요?”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파악할 수 있는 분위기는 흥분과 침착, 분노와 평안입니다. 간디를 골탕먹이려고 끈질기게 뭔가를 시도한 피터스 교수는 극도로 흥분되어 있과 화가 난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대응하는 간디는 아주 침착하며 평온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보더라도, 주님은 항상 평온상태를 유지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흥분을 애써 감추거나, 분노에 이글거리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누군가와의 대화 중에 또는 여러가지 일들 속에서 흥분이나 분노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 그런 감정의 변화가 발생하며, 왜 그 감정이 쉽게 잠재워지지 않는 것일까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한 가지만 꼽는다면, 대화의 상대를 누구로 생각하느냐에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서 흥분과 분노를 경험했다고 가정할 경우, A가 B를 24시간 내내 여전히 대화상대로 생각하고 있다면 흥분된 감정은 식을줄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B에 의해 감정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즉시 대화상대를 바꾸면 그 흥분이 가라앉거나 분노는 수그러 듭니다.  

     간디와 피터스 교수의 대화에서 피터스 교수는 한 순간도 간디를 잊지 않았습니다. 간디를 보지 않는 시간에도 간디를 여전한 대화상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달랐습니다. 피터스 교수를 만나지 않는 날에는 피터스 교수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피터스 교수를 보지않는 시간의 대화상대는 간디 자신이었습니다. 때로는 피터스 교수가 간디의 눈앞에 있을 때도 간디의 대화상대는 피터스 교수가 아니라 간디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독재자는 내 속에 있는 양심이다…비폭력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자기 정화이다.” 간디는 모든 상황에서 눈앞에 보이는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자신을 대화상대로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간디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 배운 것이었습니다. 간디의 인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고, 간디의 비폭력 운동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온갖 핍박과 멸시를 한 몸에 받으셨던 예수님의 대화상대 역시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는 적대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 즉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대화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우리를 흥분시키는 감정의 변화들을 잠재울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직결됩니다.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우리의 대화상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우리를 마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대화상대가 될 때, 어떤 감정변화 상황에서도 우리는 침착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쁠수록, 복잡한 일을 대할 수록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 우리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대화상대가 바뀔수 있고, 요동하는 우리의 감정은 진정한 평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요즘 당신은 무엇으로 바쁩니까? 너무 한가합니까? 당신이 바쁠수록, 얼마나 혼자만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5).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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